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르키예 독립전쟁 (문단 편집) == 전쟁이 남긴 영향 == 튀르키예 독립전쟁은 튀르키예 공화국을 탄생시켰으며 아직도 튀르키예 공화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의 가장 큰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바로 아타튀르크를 [[국부]]의 위치까지 올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가령 튀르키예의 가장 큰 [[국경일]]인 국권기념일 겸 어린이날([[4월 23일]]), 승리의 날([[8월 30일]])과 공화국 건국기념일([[10월 29일]])은 각각 [[1920년]] [[4월 23일]]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가 창설된 것과 [[1922년]] 둠루프나르 전투에서의 승리, 그리고 공화국의 건립을 기념하는 날이며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이즈미르를 재탈환한 날인 [[1922년]] [[9월 9일]]을 기념하는 행사나 시바스 회의가 열린 [[9월 4일]], 아타튀르크가 [[삼순]]에 도착한 날인 [[5월 19일]]에는 각 도시에서 기념행사가 열리고 아타튀르크가 사망한 날인 [[11월 10일]]에는 비록 국경일은 아니지만 튀르키예 전체가 9시부터 그가 사망한 시각인 9시 5분까지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묵념하는 시간을 갖는다. 아타튀르크가 독립전쟁 시기에 남긴 연설들, 이를테면 오늘날에까지 [[튀르키예인]]들이 의무적으로 외우는 '우리의 맹세'(Andımız)나 '오 튀르키예 청년들이여!'(Ey Türk gençler!), 그리고 각종 어록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항목을 참고할 것.]은 오늘날까지도 튀르키예인들에게 중요한 행동지침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전쟁 이후 아타튀르크가 주창한 '''조국에서의 평화, 세계에서의 평화'''는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의 주된 국시로 자리잡았다. 튀르키예 공화국의 국가인 '''[[독립행진곡]]'''(İstiklâl Marşı)도 절체절명에 몰린 시기에 군대의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만들어진 노래다.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적 근대화 개혁이 급진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원인도 이 전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에 여성들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고 튀르키예의 [[페미니즘]] 운동도 전쟁 이후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 기존의 울레마를 비롯한 [[이슬람]] 지도자들이 메흐메트 6세의 퇴위와 오스만 제국의 멸망, 그리고 [[1924년]] [[칼리파]]의 지위만 가지고 있었던 [[압뒬메지트 2세]]가 퇴위함과 더불어 영향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세속주의 정부가 장악할 수 있었다. 공화국 정부는 튀르키예 공화국 종교부(Türkiye Cumhuriyeti Diyanet İşleri Başkanlığı)를 설치하고 주류 종교([[이슬람]] [[수니파]])를 정부에 예속시킴으로써 급진적인 개혁으로 인해 일어날 이슬람 우파의 반발을 권위적으로 억누를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튀르키예의 이슬람은 종교부에 예속되어 있으며 각 [[모스크]]에 파견되는 이맘이나 뮈에진들은 전부 정부의 임명을 받아 전국에 배치된다.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는 찾기 힘든 튀르키예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튀르키예어]] 문자를 [[라틴 문자]]로 개혁하면서 [[아랍 문자]]를 사용하지 않게 되고 그만큼 [[이슬람]]의 영향력으로부터 대중들을 유리시키는 결과도 낳았다. 아타튀르크가 주창한 케말주의(Kemalizm)의 6대 원칙인 [[공화주의]](Cumhuriyetçilik), [[민족주의]](Milliyetçilik), [[인민주의]](Halkçılık), [[국가주의]](Devletçilik), [[세속주의]](Laiklik), 혁명주의(İnkılapçılık)를 통해 [[사회주의]]적인 [[계획경제]]와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흡수하면서 당시 일고 있었던 [[공산주의]]적 움직임도 사전에 차단해 훗날 튀르키예가 [[소련]]에 대항해 [[반공]] 노선을 걷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만 계획경제 고수+[[대공황]] 이중크리로 [[전간기]] 내내 튀르키예의 경제사정은 영 좋지 않았다(...) 반대편 [[그리스]]는 다 이긴 전쟁을 굴욕적 패전으로 끝냈다는 좌절감으로 전쟁을 주도한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최악으로 떨어졌는데 이후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의 주도로 왕정이 폐지되고 [[그리스 제2공화국|공화국]]이 수립되는 데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 전쟁과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으로 수많은 튀르키예-그리스인들이 추방됨으로써 [[고대 그리스]] 이래 장구한 여명을 유지해 왔던 이오니아의 마지막 그리스 정착지는 사라졌다. 또 이 전쟁으로 아르메니아와 [[쿠르드족]] 역시 날벼락을 맞았다. 아르메니아인이 세운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세브르 조약에서 튀르키예 동부 영토 및 북동쪽 해안지대를 영토로 인정받았으나 튀르키예가 아르메니아군을 격퇴하고 소련과 튀르키예가 카르스 조약을 맺어 세브르 조약에서 인정받은 영토를 몽땅 날렸다. 쿠르드족은 영국으로부터 세브르 조약을 맺을 당시 점령지 일부를 넘겨주어 독립국가인 [[쿠르디스탄]]을 세워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튀르키예가 전쟁에 승리하면서 세브르 조약이 파기되고 해당 점령지가 다시 튀르키예 영토가 되면서 독립국가 건설도 불가능해졌으며 이때의 경험 때문인지 튀르키예 정부는 이후 쿠르드족에 대해 강경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튀르키예가 이 전쟁으로 얻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닌데 전쟁이 끝난 뒤 튀르키예는 한동안 국제 [[왕따]] 신세로 전락했고[* [[세브르 조약]]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입장에서 세브르 조약은 열강들이 자기 영토를 뜯어먹는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지만 어쨌거나 국제법상 정당한 조약이었는데 이걸 튀르키예가 전쟁으로 뒤집은 것이다. 사실 얼핏 보면 열강들이 탐욕스럽게 튀르키예를 뜯어먹으려 했고 튀르키예가 이를 결사적으로 항전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튀르키예 공화국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했기 때문에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므로 열강들에게도 할 말이 없지는 않았던 것. 국제연맹이 자체 소속국인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의 위기를 방관한 [[뮌헨 협정]]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한때 적국이었으며 똑같이 국제 왕따 신세였던 [[소련]]과 가까워졌다. 민병대 수준인 튀르키예군이 협상국을 물리칠 수 있었던 건 1티어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영국도 프랑스도 끼어들고는 싶었지만 이미 1차대전을 치르면서 반전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한 번 데이고 시리아로 물러난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튀르키예에게 '계속 나대면 대영제국과 전쟁이다?'라는 엄포를 날렸는데 이에 기겁한 [[캐나다 자치령]]은 불참과 독자 노선을 외치고 영국 본토인들도 기겁하며 저 엄포를 날린 로이드 총리를 날려 버릴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